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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기행 첫번째

국내여행/서울 경기 인천

by 파란창 2011. 7. 16.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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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서울에서 가까운 섬으로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예로부터 몽공항쟁의 중심지였고, 조선시대에는 대표적인 유배지이기도 하며 외규장각이 있고 특히 조선말 외세에 대항하여 항쟁하던 곳이라 역사적 유물일 많은 곳이다. 아래 관광지도에서 보듯이 강화도에는 많은 볼거리가 있다.

서울에서 강화로 들어가려면초지대교와 강화대교중 하나를 통하여 들어가야 된다.

초지대교의 모습이다.

초지대교를 건더 남쪽해안가 쪽을 따라 가다보면 거꾸로 된 집이 보인다.



아마 여기는 동막 해변쯤인거 같다.

다시 돌아 올라와 초지진을 둘러 봅니다.

초지진은 효종때 건설 되었는데 병인양요때 전투가 있었던 곳입니다.

초지진 앞에 있는 등대입니다.

초지진에는 구한말 병인양요 당시의 진지와 포등을 전시해 놓았습니다.





초지진에서 조금 올라가면 덕진진이라 돈대가 나옵니다.

강화에는 병자호란 뒤 강화도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내성·외성·돈대·진보 등의 12진보를

만들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덕진진입니다.

덕진진의 남장포대는 강화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입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곳이라고

합니다.그러나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군대에 의하여 점령당하여 이 때 건물에 몸을 숨겨서

적과 싸울수 있도록 쌓았던 낮은 담은 모두 파괴되었고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남장포대도 고쳐 쌓았으며, 앞면 3칸·옆면 2칸의 문의 누각도 다시 세웠고, 당시의 대포를 복원

하였다고 합니다.

남장포대

덕진진에서 조금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광성보가 나옵니다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중의 하나 입니다.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외성을 쌓았는데, 이 성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성으로 바다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졌습니다.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효종 9년(1658)에 광성보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는데 숙종 때 일부를 돌로 고쳐서 쌓았으며,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 돈대가 만들어 졌습니다.   
영조 21년(1745)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안해루’라 하였습니다.

광성보 안에 있는 화포입니다.




광성보는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로 몇명만을 제외하고전원이 순국하였으며 문의 누각과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파괴되었습니다. 
1976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및 전적지를 수리하고 세운 강화전적지, 수리한 것을 기록한 비석 등이 건립되어 있습니다.

광성보에서 해안쪽을 쭉내려가면 용두돈대가 나옵니다.


용두돈대에서 앞에 바다를 바라보면 물살이 매우 빠른데 여기가 선돌목이라는 곳입니다.

매년 음력 10월 20일을 전후로 하여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날이 있습니다.

이 때 부는 바람을 손돌 바람이라고 하고 이로 인한 추위를 손돌 추위라고 합니다.

어릴때 선돌이 얼어 죽은날이란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는데 얼어 죽은건 아니고

하야간 이때쯤 갑자기 추워지는걸 선돌 또는 손돌 추위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내려오고 있습니다.

고려 중기, 몽골군이 고려를 공격했을 때, 고려의 왕인 고종은 강화도로 몽진(왕이 피난을 감)을 가게 됩니다.

육지에서 강화도로 건너기 위해 고종은 손돌이라는 뱃사공이 지휘하는 배를 탔습니다.

육지와 강화도 사이의 거리가 얼마되지 않아서 금방 갈 줄 알았는데,

막상 배를 띄우니 물살이 아주 거세고 때로는 소용돌이쳤답니다.

배가 흔들리자 고종은 손돌에게 안전하면서도얼른 가도록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손돌은 염려하지 말라며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고종은 문득 손돌이 자신을 해치려고 하는 건 아닐까 의심하여 손돌을 참수하라고 명령합니다.

손돌은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받아들이며 마지막 말을 남깁니다.

"뱃길 앞에 바가지를 띄우고 그 바가지가 떠가는 대로 따라가면뱃길이 트일 것입니다."

손돌을 죽였으나, 바다를 건널 별다른 수가 없었던 고종 일행은 바다에 바가지를 띄우고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랬더니 위험해보이는 뱃길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죠.

그제서야 고종은 손돌을 죽인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리고는 현재의 대곶면 신안리 덕포 하류 산꼭대기에 손돌의 묘를 만들고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 이후 왕이 건넜던 좁은 물길을 손돌목이라고 하고 손돌의 기일인 10월 20일 무렵에 부는

강풍을 손돌 바람이라고 부르게 되었답니다.

이건 단지 설화일 뿐이고요 하야간 손돌목 인데 실제로는 선돌목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아래 물살이 빠른곳이 손돌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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